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아낫따 – 어느 앗따의 반대말일까?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Anatta – the Opposite of Which Atta?’ 포스트
아낫따(anatta)는 앗따(atta), 즉 ‘유익한’의 반대말입니다. 여기서, ‘아낫따(anatta)는 ‘나 앗따(na atta)’, 즉 ‘유익하지 않은’에서 유래합니다. 아낫따-/앗따-(anattā/attā)는 대부분의 경우에 아낫따/앗따(anatta/atta)와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앗따-(attā)는 어떤 경우에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2017년 3월 17일; 2023년 10월 2일 개정; 2024년 10월 26일 재작성
소개
1. (어떤 주어진 언어에서) 일부 낱말들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bear’라는 낱말은 “I saw a bear”에서 큰 동물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그 낱말은 “to bear a burden”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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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어진 숫따의 맥락에서 빠알리 낱말인 atta, anatta, attā, 및 anattā의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두 가지 규칙은 대부분의 경우에 적용됩니다.
i. 세간적(또는 관습적) 용법은 ‘사람’을 나타내는 앗따-(attā)로 사용됩니다.
ii. 대부분의 경우에, atta, anatta, attā, 및 anattā라는 네 가지 낱말은 모두 틸락카나(Tilakkhana)의 아낫따 락카나(anatta lakkhana)와 연관됩니다.
사람으로서 앗따-(attā)
2. 앗따-(attā)(‘끝에 장음 a’로 발음)라는 낱말은 관습적 의미에서만 ‘사람’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려면, “그는 그 자신을 방어해야 해요”와 같이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관습적 의미에서만 존재합니다. 싱할라어에서는 그것을 ‘අත්තා’라고 씁니다. 그것이 싱할라어로 쓰인, 빠알리 띠삐따까(Pāli Tipiṭaka)에 나오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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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삐따까의 예는 “Attānaṁ damayanti paṇḍitā”이고, ‘현명한 자는 스스로를 길들인다’는 의미입니다. ‘Paṇḍitavagga in Dhammapada (verse 80)’와 ‘Dhammapada Verse 80’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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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의 부정, 즉 ‘not attā’를 표현하는 단일의 빠알리 낱말은 없습니다. 그런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 없음/아님(non-person)’이 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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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따(attā)가 ‘사람’으로서 이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아낫따(anatta)는 결코 그 ‘앗따(attā)’의 반대말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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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attā’는 ‘fāther’에서와 같이 ‘장음 a’로 발음됩니다.
‘유익한’ 또는 ‘의미있는’으로서 앗따(atta)
3. 앗따(atta)(‘cut’ 또는 ‘but’과 같이 ‘끝에 단음 a’로 발음)라는 낱말에는 ‘유익한’ 또는 ‘본질 있는’을 포함하여 여러 관련 의미가 내포됩니다. 그 부정은 ‘아낫따(anatta)’입니다. 따라서, 아낫따(anatta)는 ‘유익하지 않다’ 또는 ‘본질/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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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할라어에서는, 그것들을 “අත්ත”와 “අනත්ත’로 씁니다. 그것이 싱할라어로 쓰인, 빠알리 띠삐따까(Pāli Tipiṭaka)에 나오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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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낫따(anatta)는 ‘앗따(atta)’의 부정이며, (‘anatta’로 더 잘 운이 맞는) ‘나(na)’ + ‘앗따(att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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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낱말 조합은 아나-가-미(Anāgāmi)에도 적용됩니다. 그것은 ‘나(na)’ + ‘아-가-미(āgāmi)’에서 유래하며, 여기서 ‘아-가-미(āgāmi)’는 ‘돌아오는’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나-가-미(Anāgāmi)는 (까마 로까에) ‘돌아오지 않는’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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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나(na)’ + ‘아-가-미(āgāmi)’는 ‘아나-가-미(anāgāmi)’로 운이 맞춰집니다.
4. 아낫따(anatta)의 의미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말하는, 짧은 ‘Anatta Sutta (SN 22.143)’를 번역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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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번역자는 숫따를 설명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영어 번역자는 제목을 ‘not-self(무아/비아)’로 잘못 번역했지만 숫따(sutta)를 번역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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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Not-Beneficial(유익하지 않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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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2에서, “Yo, bhikkhave, anattā; tatra vo chando pahātabbo”는 “빅쿠들이여, 무엇이 유익하지 않다면(anattā), 그것을 바라는 것(chando)을 포기해야 한다(pahātabbo)”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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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의 다섯 무더기 각각은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시는데, ‘Rūpaṁ anat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ṅkhārā anattā, viññāṇaṁ anatt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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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낫따(anatta) 대신에, 그 구절은 ‘아낫따-(anattā)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운이 더 잘 맞기 때문이라는 것에 유의하세요. 이 숫따들은 구두 전승을 쉽게 하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숫따들은 거의 500년 동안 구두로 전승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5. 곧 있을 포스트에서 논의할 바와 같이, 루-빠(rūpa),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ā), 및 윈냐-나(viññāṇa)라는 각 용어는 일반적인 용어로 생각할 수 없으며, 이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루빠(rupa)는 루빠우빠-다-낙칸다(rupaupādānakkhandha)를 지칭하는데, 그것은 외부 대상 또는 각자의 육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대부분의 번역자는 여기서 루빠가 각자의 육체를 의미한다고 가정하는 듯하며, 따라서 번역은 ‘no-self_무아’입니다). 더욱이, 웨다나-(vedanā)는 단순히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가 갈망하는 웨다나(예를 들어, 매력적인 사람을 보는 것의 즐거움)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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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다나- 아낫따(vedanā anattā)’를 ‘느낌은 무아(non-self)다’로 낱말별로 직역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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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사이트에 있는 구 포스트에는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구 포스트를 참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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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곧 있을 개정 포스트에서 체계적인 분석을 하겠습니다.
‘자기(self)’ 또는 ‘나(me)’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빠알리 낱말
6. ‘나를/나는(me/I)’과 ‘내 것(mine)’을 나타내는 [빠알리] 낱말은 ‘아항(aham)’과 ‘마마(mam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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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soul)’이라는 의미의 ‘영원한 자기/자아’는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낫따(anatta) 또는 아낫따-(anattā)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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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도 ‘나(me)’와 ‘내 것(mine)’이라는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셨는데, 그런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그리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는 시장에 가야한다” 또는 “이것은 내집이다”와 같은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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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나 또는 영혼이라는 인식’(asmi māna)은 오직 아라한 단계에서만 사라집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만 기억/상기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닛짜, 둑카, 및 아낫따를 그 순서로 이해한다
7. 붓다께서는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yadaniccam tam dukkham, yam dukkham tadanattā” (“yad aniccam taṃ dukkham, yaṃ dukkham tad anattā“).입니다.
번역: “아닛짜(anicca) 본질의 것에 들러붙으면, 둑카(dukkha)가 일어나는데, 그러므로, 그런 행위는 현명하지 못하다(그리고 결국 난감하게 된다)(anatta)”. ‘yaṃ’과 ‘yad’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동일한 식으로, ‘yadidaṃ’은 ‘yad idaṃ’에서 유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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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아닛짜 본질은 (그런 것에 들러붙고 부도덕한 행을 하면, 그 결과가 괴로움/고통이라는 면에서)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괴로움/고통이 현실로 드러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을 팔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이 파괴한 삶 때문에 아빠-야(악처)에 재탄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ana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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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윳따 니까-야(아닛짜 왁가)에 있는 많은 숫따에는 위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Yadanicca sutta (SN 22.15)’, ‘Ajjhattanicca Sutta (SN 35.1)’, ‘Bahiranicca Sutta (SN 35.4)’을 참조하세요.
8. 붓다께서는 다섯 고행자에게 설하신 첫 법문인 ‘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에서 아닛짜 본질을 설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아닛짜 본질의 것에 갈망(우빠-다-나)하는 것이 어떻게 괴로움(둑카)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 숫따의 정수(에센스)는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몇 페이지로 요약되어 있지만, 붓다께서는 며칠 동안 그들과 그 개념을 논의하셨습니다. 오직 꼰단냐 존자만이 첫날 밤에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다른 네 명은 그 이후의 날에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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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모두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자, 붓다께서는 두 번째 숫따를 설하셨는데, 그 숫따는 아낫따 개념을 설명하는 ‘Anattalakkhaṇa Sutta (SN 22.59)’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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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두 번째 법문의 마지막에, 다섯 고행자 모두가 아라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표식 12.3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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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포스트에서, 아닛짜의 근본 개념을 논의하겠습니다.
아낫따 본질은 아나-타(anātha)로 이어진다
9. 아낫따 본질의 것에 참여하는 자는 나-타(nātha)의 반대인 아나-타(anātha, 난감함/무력함)가 됩니다. ‘앗따- 히 앗따노- 나-토-’ 포스트에 언급된 바와 같이, 나-타(nātha)는 닙바-나를 나타내는 또 다른 낱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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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구절은 (위 #2에 따른) ‘사람’을 나타내는 ‘앗따-(attā)’의 또 다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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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결국 난감(무력)하게 됩니다. 반면에, 유일한 피난처(‘nātha’)는 닙바-나, 즉 재탄생 과정을 극복하는(그치는) 것입니다.
명사의 복수형을 나타내는 ‘ā’의 용법
10. 관련된 문제는 ‘a’를 ‘ā’로 바꾸면 명사의 복수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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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복수형을 나타냅니다. ‘manusso’는 한 사람을 나타내고, ‘manussā’는 복수의 사람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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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명사 이외의 낱말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낫따-(anattā)’는 ‘아낫따(anatta)’와 동일합니다. 그것은 아낫따 본질이라는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주로 아낫따-(anattā)로 사용되는데, ‘vedanā anattā’에서와 같이, 그것이 운이 더 잘 맞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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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우리가 문법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측면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요약
11. 심각한 실수는 아낫따(anatta)를 사람 또는 자아(self)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가진 앗따-(attā)의 반대말로 번역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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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낱말 아낫따(antta)는 항상 ‘이득 없음’ 또는 ‘본질 없음’이라는 깊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31영역의 이 세상에서 지속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아낫따(anatta)가 나타냅니다. 때때로, 구절에서 운이 더 잘 맞는 ‘vedanā anattā’에서와 같이, 그것은 ‘장음 a’를 가진 아낫따-(anattā)로 쓰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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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관습적 의미로) 앗따-(attā)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atta, anatta,및 anattā라는 낱말은 결코 그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