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마음의 평화를 닙바나에 - 핵심 단계
원문: Living Dhamma 섹션의 ‘Peace of Mind to Nibbana - The Key Step’ 포스트
- 2016년 8월 12일 작성, 2016년 12월 21일 개정; 2022년 8월 27일 개정(필자는 이 포스트를 2016년에 작성했다는 것에 주목)
닙바-나(Nibbāna)로 가는 성스런 길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의 평화(Nirāmisa sukha, 쿨링 다운)’을 경험해야 합니다.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 단계로 전환은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경험하면서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할 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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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환 후,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는 빤짜니-와라나(pañcanīvaraṇa, 5가지 장애)의 제거로 영구적이 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더 많은 포스트를 필요로 하겠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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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명상해야 하는지를 모른 채 명상하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붓다 담마의 기본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 있는(알려져 있는) 평범한 명상 테크닉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더 깊은 담마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 10가지 불선행)으로부터 가능하면 더 많이 멀어져야 합니다.
1. 이전 포스트 ‘리빙 담마 - 소개’에서 X님의 경험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 포스트를 보기 전에 그것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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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님은 정기적인 ‘아나리야 메따 바와나(anariya metta bhavana, 세간적 자애 명상)’에 참여하여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경험했습니다.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상태로 이어졌음에도, X님은 동시에 어떤 유형의 감각적인 즐거움(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에 관여하려는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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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X님은 2주 동안 명상을 멈추었고, 책이나 음악을 즐기는 능력이 되살아 났습니다. 그러나,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도 사라졌고, X님의 마음은 다시 부담스럽고 동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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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시적인 쿨링 다운(cooling down) 또는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전문 용어인 낄레사(kilesa)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이것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단계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계별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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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려면 적어도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와 감각적 즐거움 사이의 차이를 경험하기 위해 그 단계(X님이 있었던 곳)에 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 빤짜니-와라나(pañcanīvaraṇa)가 일시적으로 걷혀지고 마음은 아닛짜(anicca) 본질(특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문을 듣는 중에도 잠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감각적 즐거움에 완전히 빠져 있으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정신적 부담은 그 사람에게 뚜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후에 있는 정신적 동요’에 익숙해져 있고 대부분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의 평온한 상태’에 들어갈 때만, 배후에 있는 이 ‘거듭되는 동요 또는 끊임없는 고통’의 짐(부담)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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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X님은 빤짜니-와라나(pañcanīvaraṇa, 5장애)로 인한 이 ‘끊임없는 고통’이라는 결과로부터 벗어남을 맛보기 시작했으며, 이 벗어남을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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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난제는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X님에게 낙담(실망)스럽게도, 좋아하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즐길) 수 있는 능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3.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이 문제(난제)는 X님이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이 새로운 섹션에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닛짜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단계별 과정’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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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님의 생각으로는, 그 감각적 즐거움은 매달릴(의지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매우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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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얼마간의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잃은 소따-빤나도 여전히 (갈망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소따-빤나도 감각적 즐거움을 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물론, 소따-빤나는 아빠-야가-미(apāyagāmi, 사악처로 향하는) 행위로 감각적 즐거움을 구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4. 이것이 X님의 단계에서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의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은 일부 감각적 즐거움을 구하는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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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어진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또는 적어도 무가치함)을 참으로 깨달을 때만 마음은 그 ‘사라지지 않는 느낌’을 감각적 즐거움을 자동적으로 잃습니다. 예를 들어,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활동의 나쁜 결과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는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낚시, 알코올 중독자 또는 마약 사용자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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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anicca) 본질(특성)에 대한 이해는 점차적으로 옵니다. 사람은 먼저 부도덕한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을 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극단적인 감각적 즐거움’의 무가치함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오직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서만 ‘까-마 로까(kāma loka, 욕계)의 어떠한 감각적 즐거움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봅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단계별 과정입니다.
5. 그것은 매우 귀중하다고 여겨졌던 [가짜] 금목걸이를 붙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목걸이가 모조품이였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되면, 즉각 그 목걸이에 대한 들러붙음(애착)을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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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anicca) 특성(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 단계에 이르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즉, 일부 ‘극단적인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함(및/또는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그 단계의 사람이 일부 감각적 매력(끌림)에 대한 갈망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할지라도, 몇 주 또는 몇 달 안에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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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아닛짜(anicca) 특성에 대해 명상을 하면 할수록 다른(덜 해로운)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함도 더 많이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단계별로 (명상을) 진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까-마 라-가(kāma rāga, 신체 접촉과 냄새와 맛을 통한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를 제거하는 것은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서만 일어납니다.
6. 그러나, ‘X님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싶은 욕구를 잃었다’는 점에서 좀 특이한 것이라고 필자는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정말로 ‘극단적인 감각적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 전[역자 삽입글 :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싶은 욕구를 잃기 전]에 사람들은 낚시를 하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등의 욕구를 잃고, 또한 거짓말, 잡담, 중상모략, 절도, 성적 부정행위 등으로 즐거움을 얻으려는 욕구를 잃을 것입니다. 어쨌든 X님은 결코 그런 [역자 삽입글: 극단적 행을 하는] 경향은 없었던 것으로 필자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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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또한, 사람들이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가 되거나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hka)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감각적 즐거움을 잃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역자 삽입글 :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소따-빤나(Sotapanna, 수다원)일지라도 그 두가지 성향[역자 삽입글 :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를 원하는 성향]을 여전히 가질 수 있습니다. 붓다 재세시에 수다원이 되었지만 술마시고자 하는 충동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그러나 그 사람은 수다원 단계에 도달한 후, 그리 오래 살지 못했음)에 대해 필자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수다원에 도달했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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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는 아빠-야(apāya, 악처)에 재탄생하기에 적합하게 하는 그런 행위들만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다원 성자는 높은 레벨의 ‘로바(lobha, 탐욕)와 도사(dosa, 성냄)와 모하(moha, 무지)’를 제거하여, ‘까-마 라-가(kāma rāga)와 빠띠가(patigha)와 아윗자(avijjā)’라는 낮은 레벨로 성향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로-바, 도-사, 모-하’ 대 ‘라-가, 빠띠가, 아윗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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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X님이 전생, 그러나 바로 앞 전생에서,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a, 세간 선정)를 길렀고, 현생에 그 가띠(gati)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X님은 자-나(jhāna, 선정)와 관련된 신체적 느낌들을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X님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정말 무해한 것들에 대해서도 최소한 일시적으로 들러붙음(애착)을 잃기 쉬운 이유입니다.
7. 각 사람은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 단계에 도달하면 한 세트의 개별적 특성(가띠, gati)를 잃게 됩니다. X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 변화들이 영구적인지 아닌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래에 논의된 필자의 개인적 경험은 2016년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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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필자는 30년 이상 동안 해왔던 음주 행위, 즉 퇴근시에 술마시고자 하는 충동을 잃었습니다. 필자는 그 음주습관을 계속할 때에 생길 수 있는 나쁜 결과들을 숙고하였지만, 그 음주습관을 힘을 다해 (강제하여)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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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길(팔정도)을 따라갈 때, 감각적 즐거움을 억지로 포기하지 않고 오직 다른 유정체(생명체)를 해칠 수 있는 부도덕한 행동만 포기합니다. X님도 책 보기나 음악 듣기를 억지로(힘을 다해) 포기하지는 않았고 그냥 그렇게 포기되는 것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잃는 것은 극단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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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픽션(소설)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잃었습니다. 필자는 모든 종류의 책을 읽곤 했지만 지금은 픽션(소설)을 읽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필자에게는 그것은 마치 TV(드라마 등)를 보는 것처럼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필자는 이제 더 많은 논픽션 책을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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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년 동안, 필자는 또한 과학 관심사에서도 더 결실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2년 전만 해도 필자에게 명백하지 않았던 양자 역학의 미묘한 점을 배워 왔습니다. 사람이 낄레사(kilesa, 번뇌)를 제거함에 따라 마음은 훨씬 더 맑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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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사람이 모든 관심(흥미)을 잃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탐함, 미워함, 미혹함과 관련된 활동에만 관심(흥미)을 잃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뒤돌아 볼 때 꽤 명백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라한과(Arahanthood)를 성취했을 때만 모든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잃습니다.
8. 요점은 먼저 X님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적어도 일시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생기는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와 감각적 즐거움(아-미사 수카, āmisa sukha)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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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인데, 가능한 한 많이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 10가지 불선행)를 멀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9. 많은 사람들이 닙바나적 즐거움을 단지 감각적 즐거움을 생각하기 때문에, 즉 닙바나적 즐거움을 음악과 좋은 음식 등을 즐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닙바나적 즐거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X님의 설명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려 주는 데 있어서 그렇게 좋은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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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것은 아-미사(āmisa), 니라-미사(nirāmisa), 자-나 수카(jhāna sukha) 및 닙바-닉 수카(Nibbānic sukha) 중의 차이를 논의하기에 좋은 곳(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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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바나적 즐거움은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와는 다르기 때문에 필자는 그 이름을 ‘닙바-닉 수카(Nibbānic sukha)’로 지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웰빙’의 전체적 상태입니다. 필자는 그것이 더 높은 단계에서 무엇과 같은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몸과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진정 효과(calming effec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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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 즐거움은 아-미사(āmisa) 또는 사-미사(sāmisa) 수카로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사 수카(āmisa sukha)에 익숙합니다.
10.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는 몇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길(팔정도)에도 도움이 되고 아닛짜(anicca) 본질(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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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사 수카(āmisa sukha)를 불러 일으키는 찟따(citta)들은 낄레사(kilesa, 번뇌) 또는 아꾸살라 쩨따시까(akusala cetasika)(다음 포스트에서 논의할 예정임)로 부담(짐)이 됩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압박에 시달리는 동요하는(불안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압박 - 둑카 삿짜의 핵심’를 보세요. 이것은 X님이 앞 포스트에서 “..저는 몇 주 동안 공식(집중) 명상을 중단했고, 저는 이전처럼 동요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 끊임없는 압박을 없애면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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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돕거나 배고픈 사람이나 동물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의 도덕적인 활동을 할 때, 사람은 또한 짧은 시간 동안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느낌은 그러한 활동 중에 일어나는 찟따(citta, 마음, 생각)에 낄레사(kilesa, 번뇌)가 없기 때문에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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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아리야(Ariya) 또는 아나리야(anariya) 명상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여기에서도 사람의 마음에는 대부분 낄레사(kilesa, 번뇌)가 없습니다(사마-디(samādhi)의 힘에 달려 있음).
11. 붓다께서 추천하신 높은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나(jhāna, 선정)로 인해 생기는 수카(sukha)입니다. 자-나(jhāna, 선정) 상태에 있을 때, 그 사람은 루빠 로까(rupa loka) 또는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 속하는 마음으로 진행되는 찟따(citta)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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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에 따르면, 그 찟따(citta)는 또한 낄레사(kilesa, 번뇌) 또는 정신적 불순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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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나(Jhāna, 선정)는 사마-디(samādhi)가 특정 수준으로 강화될 때(길러질 때) 생깁니다.
12. 니완 수카(Nivan sukha) 또는 닙바-닉 수카(Nibbānic sukha) 또는 열반의 행복(Nibbānic bliss)은 찟따(citta)가 훨씬 더 순수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 찟따(citta)들에는 끊임없는 동요나 스트레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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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찟따(citta)들은 또한 빠빳사라 찟따(pabhassara citta, 빛나는 찟따)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닙바나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및 ‘빠밧사라 찟따, 빛나는 마음, 및 바왕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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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는 자-나(jhāna, 선정)를 길러 소따-빤나 팔라 사마빳띠(Sotāpanna phala samapatti, 수다원 과 본삼매)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 단계의 닙바-닉 수카(Nibbānic sukha)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수다원 성자는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남(해방)은 영구적입니다.
13. 곧 이 시리즈에서 끊임없는 동요와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윤회의 고통을 야기하는 아꾸살라 쩨따시까(akusala cetasika, 불선 마음요소)인 낄레사(kilesa, 번뇌)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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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압박은 낄레사(kilesa, 번뇌) 또는 아꾸살라 쩨따시까(akusala cetasika)로 부담(짐)이 된 찟따(citta)로 인한 ‘즉각적인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런 찟따(citta)의 ‘지연된 결과(효과)’는 나중에 더 많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를 가져오고, 더 강력한 것은 아빠-야(apāya, 악처)에 재탄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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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 단계에 이르는 핵심 스텝은 도덕적 행동(sila, 실라)과 좋은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니라-미사 수카(nirāmisa sukha)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아닛짜(anicca) 본질(특성)을 파악하는 것에 열려 있습니다. 즉, [아닛짜 본질을 파악하도록] 빤짜니-와라나(pañcanīvaraṇa, 5장애)는 며칠 동안 억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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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사람이 도덕적 삶을 살고 순수한 담마를 숙고할 때, 그 전환은 빠르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전환을 알아 차리지 못하더라도 소따-빤나 팔라(Sotāpanna phala, 수다원 과) 순간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다원과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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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소따-빤나(Sotāpanna, 수다원) 단계를 논의하기 전에 논의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