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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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리야’와 ‘아-야따나’ 사이의 큰 차이


원문 : Key Dhamma Concepts 카테고리의 ‘Indriya and Āyatana – Big Difference’ 포스트

- 2016년 5월 7일, 2017년 12월 4일 개정


1. 감각 접촉을 즐기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31 영역의 세상에서 끝없이 살아 왔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러한 감각 접촉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 진정한 본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한 육체적 뇌에 있다고 간주하고 오감으로부터 오는 신호를 처리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의식 또는 인식을 생성한다고 간주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 위 설명은 통상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론이며, 특히 서양 세계에서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대부분 동양 세계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 붓다 담마에서, 우리의 감각 기능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그래서, 붓다 담마에서는 인드리야(indriya)와 아-야따나(āyatana)라는 두 가지 버전의 감각 기능이 있습니다.


* 육체적 감각 기능에 대해서는 인드리야(indriya)라고 부릅니다.

* 그러나 인드리야(indriya)는 상황에 따라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이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

* 더구나, 감각 기능을 단순히 인드리야(indriya)가 아닌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함으로써, 정말로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겠습니다.


3. 다섯 가지의 육체적 감각 기관, 즉 인드리야(indriya)는 외부 물리적 세계로부터 정보 (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및 감촉)를 얻어내기 위해 육체에 장착된 단지 ‘물리적 기구’입니다.


* 또한, 붓다 담마에는 외부 세계로부터 담마-(dhammā, 개념, 가티, 바와 등)를 받아들이는 또 다른 인드리야(indriya), 즉 마닌드리야(manindriya)가 있습니다. 이 마닌드리야(manindriya), 즉 마나 인드리야(mana indriya)는 뇌 안에 있으며, 아직 과학으로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이에 대해서는 ‘What are Dhammā? – A Deeper Analysis’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4. 이제, 어떻게 이 인드리야(indriya)가 아-야따나(āyatana)로 되는지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의도적으로 인드리야(indriya)를 사용하여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성 상카-라)를 축적할 때, 인드리야(indriya)는 아-야따나(āyatana)가 됩니다.


* 그 차이를 밝히는 다른 방법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보)가 감각으로 입력될 때는 감각 기능이 인드리야(indriya)로 작용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의도적으로 감각 기능을 사용하여 새로운 깜마(new kamma)를 생성시키면 그 감각 기능은 아-야따나(āyatana)로 작용한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 그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5. 우리가 그냥 좋은 집을 보았을 때(말하자면, 걷고 있는 동안), 눈은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좋아하여 멈추고, 들러붙는 갈애로 그 집을 계속 바라본다면, 눈을 ‘짝까-야따나(cakkāyatana)’, 즉 ‘짝쿠 아-야따나(cakkhu āyatana)’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배고픔을 해소하기(누그러뜨리기) 위해 무언가를 먹고 단지 그 맛을 경험한다면, 혀를 ‘지와- 인드리야(jivhā indriya)’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들어붙는 갈애가 형성되어 나중에 다시 그 맛을 즐기려고 무엇을 더 생각한다면, 혀는 지와-야따나(jivhāyatana), 즉 지와 아-야따나(jivhā āyatana)로 사용됩니다.

* 샤워(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 욕실로 걸어갈 때, 몸을 까-야 인드리야(kāya indriya)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때리기 위해 걸어가는 것은 몸을 까-야-따나(kāyātana), 즉 까-야 아-야따나(kāya āyatana)로 사용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은 몸을 까-야 인드리야(kāya indriya)로 사용하는 것입니다(아비상카-라_abhisankhāra를 수반하지 않음). 그러나 거짓말이나 험담(입방아 찧는 말 등)을 하는 것은 몸을 까-야-따나(kāyātana), 즉 까-야 아-야따나(kāya āyatana)로 사용하는 것입니다(아비상카-라_abhisankhāra를 수반함).

* 잊혀진 주소를 기억해 내기 위해 마음을 사용할 때, ‘마닌드리야(manindriya)’, 즉 ‘마나 인드리야(mana indriy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행위에 대해 환상을 가질 때, 그것은 마나-야따나(manāyatana), 즉 마나 아-야따나(mana āyatana)와 관련 있습니다.


6. 이것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다른 간단한 방법은,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를 뇌가 이미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단지 카메라와 같은 완전히 기계적인 장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 ‘짝까-야따나(cakkāyatana)’는 그 정보가 뇌에 의해 ‘짝꾸 빠사다 루-빠(cakkhu pasada rūpa, 눈의 감성물질)’로 전송되고 ‘하다야 왓투(hadaya vatthu, 마음 토대)에 의해 처리될 때 활동하게 됩니다.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가티, gathi)에 따라 그 사람은 그 시각 대상에 대한 탐함이나 성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짝까-야따나(cakkāyatana)’ 및 다른 몇 가지 아-야따나(āyatana)는 더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입니다.

* ‘짝까-야따나(cakkāyatana)’ 등은 아라한뜨(Arahant) 성자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탐함이나 성냄을 유발할 수 있는 아누사야(anusaya, 잠재성향)나 아-사와(āsava, 번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까마 가티(kama gathi), 라-가 가티(rāga gathi), 도-사 가티(dōsa gathi), 모-하 가티(mōha gathi) 등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 나머지 다른 종류의 감각 기능들도 위와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7. 이제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인드리야(indriya)는 외부 세계로부터 ‘감지 신호 추출’을 돕는 물리적인 장치로 간주될 수 있지만, 아-야따나(āyatana)는 정신적인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 6가지 아-야따나(āyatana)(6가지를 합쳐서 ‘살라-야따나_salāyatana’라고 통칭함)는 상황에 따라, 또한 특정인의 가티(gathi)에 따라 주어진 순간에 생성될 수 있습니다.

* 아꾸살라-물라 빠윳띠(쁘라유르티)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vutti (Pravurthi) Paticca Samuppada, 삶 중의 불선뿌리 연기)에서, ‘살라-야따나(salāyatana)‘는 ‘나-마 루-빠 빳짜야- 살라-야따나(nāma rūpa paccayā salāyatana, 나-마 루-빠에서 살라-야따나가 연기)’를 통해 일어납니다. 연기 단계를 뒤로 추적하여 가면, ‘나-마 루-빠(nāma rūpa)’는 ‘윈냐-나 빳짜야- 나-마 루-빠(viññāna paccayā nāma rūpa, 윈냐-나에서 나-마 루-빠가 연기)’를 통해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뒤로 가면,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nkhāra paccayā viññāna)’,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nkhāra)’에 이릅니다. 따라서, ‘살라-야따나(salāyatana)’는 ‘아윗자-(avijjā)’로 시작하는 일련의 정신적 활동으로 일어납니다.

* 6가지 인드리야(indriya) 중 하나가 감각 입력을 불러들일 때, 그 감각 입력은 아윗자-(avijjā, 무명) 때문에 탐함 또는 성냄을 유발할 수 있고, 위 일련의 연기 단계를 통해 살라-야따나(salāyatana, 6가지 아-야따나) 중 하나 이상이 생성되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8. 그러므로 인드리야(indriya)는 순간순간 변하지 않지만, 아-야따나(āyatana)는 순간순간 변합니다.


* 예를 들면, 눈(짝꾸 인드리야, cakkhu indriya)는 수년간 크게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고를 당하면 즉각 변하거나, 나이가 들면 그 기능이 쇠퇴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짝까-야따나(cakkāyatana)는 순간순간 변합니다. 우리는 시각을 즐겁게 하는 대상에 즉각 끌릴 수 있습니다.


9. 다른 예로, 알콜 중독자가 공항 대합실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바(술집)가 보인다면, 멈추어 찬찬히 살펴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술을 마시려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처음 감각 입력(짝꾸 인드리야_cakkhu indriya로 술집을 봄)은 음주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아-사와_āsava, 아누사야_anusaya)이 마음에 일어나도록 자극했습니다. 그 다음 아윗자-(avijjā)가 활동하여, 6가지 아-야따나(āyatana) 중의 적어도 2가지가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음주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마나-야따나_manāyatana)과, 바(술집)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주문하는 것(까-야-따나_kāyātana)입니다.

*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같은 바(술집)를 보았고,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습니다. 이 경우 그들에게는 짝꾸 인드리야(cakkhu indriya, 눈 인드리야)를 통한 감각 입력은 ‘살라-야따나(salāyatana)’ 중의 어떤 것도 일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 이런 이유로, 보통 사람에게도 감각 기능이 항상 아-야따나(āyatana)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10. 이 세상에 산다면, 살기 위해서 감각 기능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감각 기능을 인드리야(indriya)로 사용합니다.


* 그러나, 감각 기능을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할 때, (특히, 그러한 행위가 강하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미래 바와(bhava)를 만들고 있습니다.


11. 이제, 인드리야 바-와나-(indriya bhāvanā)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바-와나-(bhāvanā)는 간단히 말하여, 인드리야(indriya)를 아-야따나(āyatana)가 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물론, 처음에는 가장 심각한 행위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을 볼 때, 거기에 멈추어 서서 집에 가져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하면, 아-야따나(āyatana)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막가 팔라(magga phala, 도과)를 얻지 못한 보통 사람에게는 이를 삼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 하지만, 물건에 들러붙음이 강해지면, 짝까-야따나(cakkāyatana)가 아닌 다른 아-야따나(āyatana)로 이어져, 훔치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 사고방식이 작용하자마자,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강경하게 중단해야 합니다.

* 따라서, 인드리야 바-와나-(indriya bhāvanā)는 사띠빳타-나 바-와나(Satipatthāna bhāvanā)의 특별하게 적용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 인드리야 바-와나-(indriya bhāvanā)는 ‘앉아 명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보통 일상생활을 동안 실천해야 합니다.


12. 그래서, 아라한뜨(Arahant, 아라한) 성자만이 항상 감각 기능을 인드리야(indriya)로 사용합니다. 아라한 성자는 몸 감촉, 맛, 냄새, 소리(음악), 그림 또는 어떤 종류의 개념(견해)에 들러붙지 않습니다.


* 보통 사람이라도 눈을 항상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되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보는 대부분의 것들을 무시합니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그것들이 우리 내부의 아누사야(anusaya, 잠재성향) 또는 아-사와(āsava, 번뇌)를 자극하지 않거나 우리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가티(gathi)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 마지막으로, 다른 문맥에서 나타나는 다른 유형의 인드리야(indriya)가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 예를 들면, ‘깨달음의 37가지 인자(37조도품)’에서 빤짜 인드리야(panca indriya)는 매우 다른 유형의 인드리야(indriya)를 나타냅니다. 빤짜 인드리야(panca indriya)는 사띠(sati, 마음챙김), 사마디(samadhi, 마음의 고요함), 빤냐(panna, 지혜), 위리야(viriya, 노력) 및 삿다(saddha, 앎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37 Factors of Enlightenment’ 포스트와 ‘Two Versions of 37 Factors of Enlightenment’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빤짜 인드리야(panca indriya)에는 5가지 인드리야(indriya)가 있지만, 감각 기능과 관련해서는 6가지 인드리야(indriya)가 있습니다.


    • 아-야따나(āyatana)로 경험되는 ‘마음이 만든 즐거움(mind-made pleasure)’을 앗사-다(assāda, 싱할라어로 āsvāda)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심층 분석은 ‘Assāda, Ādīnava, Nissarana’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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