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아닛짜 - 세속적인 것들의 무가치함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Anicca – Worthlessness of Worldly Things’ 포스트
- 2017년 8월 20일 작성; 2020년 6월 8일 개정
아닛짜의 다양한 의미
1. 아닛짜(Anicca)(‘anichcha’로 발음)는 여러 의미를 가지는 심오한 개념입니다(비영구성/무상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의 해석으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스럽게 계속 유지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아닛짜 - 좋아하는 것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음’ 포스트에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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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생성되었다가 괴멸됩니다. 모든 것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위빠리나-마, viparināma)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아닛짜 - 생멸(생성과 괴멸)을 반복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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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을 논의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이고 행복을 지속시켜 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갈망하면 할수록 더 많은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질 수만 있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는(갈망하는) 것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
2.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iccā 또는 icchā, ichchā로 발음)은 각자가 그 대상을 평가하는 가치에 따라 다릅니다. 대상이 중요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은 그 대상에 대한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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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그것에 닛짜(nicca)(‘nichcha’로 발음) 본질이 있다고 여기는, 즉 가치가 있고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 잇짜(iccā, 욕망, 좋아함)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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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어진 대상이 참다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대상에 대한 갈망을 잃습니다. 아닛짜 본질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참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발점은 ‘(겉으로 보기에) 큰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부도덕한 행위는 피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치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이해 수준에 따라 다르다
3. 5살짜리 아이에게 큰 초콜릿 바와 새로운 브랜드의 집에 대한 소유권(아이가 집 소유자가 될 수 있도록 이름을 적어 넣은 서류)을 주면서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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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당연히, 아이는 초콜릿을 원할 것이고, 그 아이는 종이조각이 맛있는 초콜릿보다는 얼마나 더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아이는 초콜릿에 대한 닛짜(nicca) 인식, 즉 초콜릿이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인식을 하지만, [종이조각에 의한] 집의 소유권으로부터 생기는 행복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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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주저하지 않고 종이조각(집의 소유권)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 아이는 그 종이조각(집의 소유권)이 초콜릿 바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른은 초콜릿의 아닛짜(anicca) 본질을 깨닫습니다. 즉, 그것은 단지 몇 분 동안만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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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분명히 그 어른(성인)에게 집에 대한 소유권이 초콜릿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말해야 했습니까? 아니었지요. 사람은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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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식으로, 사람이 담마(Dhamma)를 배우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참다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경향은 갈망에 기반한다
4. 모든 부도덕한 행위(dasa akusala)는 세상 것들을 평가하는 ‘가치’ 때문에 행해집니다. 아이는 그 초콜릿 때문에 또 다른 아이를 때릴 수도 있습니다. 어른은 집을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거나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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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른이 붓다 메시지의 핵심을 파악할 때, 집에 대한 아닛짜(anicca) 본질도 깨달을 것입니다. 집에 대한 갈망조차도 집과 관련된 갈망을 제거하여 얻을 수 있는 ‘쿨링 다운(cooling down, 불이 사그라듬/시원함)’과 비교하여 보면 가치가 없습니다. 물론, 집을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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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은 집이나 자동차 등 귀중한 것을 모으거나 (필요 이상으로 많이) 돈을 버는 것은 결국 고통(괴로움)을 가져올 수 있음(그리고, 담마를 배워 닙바-나(Nibbāna)를 향해 진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잃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갈망의 좋지 않은 결과
5. 감각 대상에 대한 갈망은 그 좋지 않은 결과가 광범위하게 생길 수 있습니다. 낮은 레벨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감각의 즐거움을 즐기기만 하는 것은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에 묶이게 합니다. 이는 ‘빠띠 잇짜- 사마 웁빠다(pati iccā sama uppada)’, 즉 ‘무엇을 좋아하여 집착하면 그 번뇌에 따른 것을 생성하고 경험한다’는 연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빠띳짜 사뭅빠-다 ㅡ '빠띠+이치차' + '사마+웁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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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귀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dasa akusala)를 한다면, 미래의 삶에서는 아빠-야(apāya, 악처)에서 둑카 둑카(dukkha dukkha, 직접적인 고통)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소개-2 ㅡ 괴로움의 세가지 범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것은 최악의 미래 고통이며, 재탄생(윤회)을 믿지 않거나 깜마- 위빠-까(kammā vipāka, 업보)를 믿지 않는다면, 즉 밋짜-딧티(miccāditthi, 사견)를 가진 사람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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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밋짜-딧티(miccāditthi, 사견)를 없애면, 아닛짜(anicca) 본질의 한 측면을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것은 ‘아닛짱 카얏떼나(aniccaṃ khayaṭṭhena)’, ‘아닛짜(anicca) 본질은 사람을 낮은 영역(악처)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것, 즉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악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dukkha dukkha, 둑카 둑카)을 겪는 것에 결국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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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아닛짜(anicca) 본질은 결국 만족스럽게 어떤 것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장래에 많은 고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이해는 소따빤나 단계로 이어진다
6. 사람은 위의 아닛짜(anicca) 본질의 가혹한 결과를 이해함으로써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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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Buddha)께서는 또한 둑카(dukkha)의 특징을 기술할 때, ‘둑캉 바얏떼나(dukkhaṃ bhayaṭṭhena)’, 즉 ‘사람은 둑카의 본질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따빤나 단계에서, 사람은 아닛짜(anicca)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빠-야(apāya, 악처)에서 고통(괴로움)을 겪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따빤나 단계의 사람은 많은 고통(괴로움)(비록 아빠-야의 고통보다 적지만)이 감각적 즐거움에 단지 집착하는 것(까-마 라-가, kāma rāga)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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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둑캉 바얏떼나(dukkhaṃ bhayaṭṭhena)’의 완전한 충격적 영향(두려움)은 아나-가미(Anāgami, 아나함) 단계에서만 실현됩니다.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사다함) 단계에서는 그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감각적인 즐거움을 갈구하는 것과 관련된 둑카(dukkha)만 깨닫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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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은 상카-라 둑카(sankhāra dukkha)와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로 이끕니다. 이에 대해서는, ‘소개 ㅡ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포스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7.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단계에서, 그 성자는 아닛짜(anicca) 본질을 사전 레벨에서 이해하고 둑카 둑카(dukkha dukkha, 직접 고통)을 파악합니다. 비록 수다원 성자가 다른 두 가지 측면의 둑카(dukkha), 즉 상카-라 둑카(sankhāra dukkha, 형성 고통)와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 변화 고통)의 진실을 볼 수는 있지만, 참으로 그 영향(위험)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둑카(dukkha)의 그 두 측면은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의 상위 영역(인간과 천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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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카-라 둑카(sankhāra dukkha, 형성 고통)와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 변화 고통)는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사다함) 단계에서 참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며, 아나-가미(Anāgami, 아나함) 단계에서 완전히 이해될 것입니다. 그것은 둑캉 바얏떼나(dukkhaṃ bhayattena)를 더욱 강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꼭 부도덕한 행위에 관계하지 않더라도) 감각적 즐거움에 집착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둑카(dukkha)의 유형에서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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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 즐거움의 나쁜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된 위험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는 여전히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에 재탄생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감각적 욕망을 갈망하는 것은 아나-가미 단계에서만 없어진다
8. 아나-가미(Anāgami, 아나함) 단계에 이르면, 까-마 로-까(kāma lōka)의 영역에 유정체를 묶는 하위 5가지 유형의 족쇄(ōrambhgiya samyōjana, 오-람바기야 상요-자나)을 제거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사 상요-자나 - 재탄생 과정의 족쇄’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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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높은 루빠 영역(색계)과 아루빠 영역(무색계)에 관련된 상위 5가지 족쇄(samyōjana, 상요-자나)가 있습니다. (하위 5가지 족쇄를 제거한 성자는) 처음에 루빠 자-나(rupa jhāna, 색계 선정)에 집착하는 루빠 라-가(rupa rāga, 색계에 대한 갈망)를 제거한 다음, 아루빠 자-나(arupa jhāna, 무색계 선정)에 집착하는 아루빠 라-가(arupa rāga, 무색계에 대한 갈망)을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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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빠 영역과 아루빠 영역(상위 20가지 영역)에서는 주로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의 즐거움을 가집니다. 그 영역에서는 둑카 둑카(dukkha dukkha, 직접 고통)와 상카-라 둑카(sankhāra dukkha, 형성 고통)는 대부분 나타나지 않고, 오직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 변화 고통)(결국 죽음)만 나타납니다. 그 영역의 유정체는 (업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악처에까지 떨어질 수 있는 마지막까지 선정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9. 자연(현상)의 3가지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계는 어른으로서 귀중한 것(집, 돈 등)을 모으는 것이 어린 시절에 사탕 포장지를 모으는 것과 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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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 따라 더 높은 지혜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우선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아닛짜(anicca) 본질, 즉 귀중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장기적으로 볼 때 고통으로 이끌기만 한다는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장기적’이 의미하는 것은 현생뿐만 아니라 내생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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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탄생을 믿는 것이 세속의 길(세간 팔정도)을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중요한 조건이 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세상은 닛짜 본질이 아니라 아닛짜 본질이다
10. 이 세상의 그 무엇이 닛짜(nicca) 본질을 지닐 것이라고 믿는 것, 즉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정말로 항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실상은 반대이고 그 실상은 아닛짜(anicca)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아닛짜(anicca)의 하나의 의미는 ‘영구적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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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업의 법칙을 믿지 않는다면, 즉 누군가의 행위가 그에 따른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임을 믿지 않는다면, 이 아닛짜(anicca)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도전적 과제입니다. 업의 법칙이 자연적으로 널리 퍼지는 이유는 재탄생 과정(윤회)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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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생에서 행해졌지만 이 생에서 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행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미래 삶에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따라서, 업의 법칙은 재탄생 과정(윤회)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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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더 많은 잇짜-(iccā, 좋아함, 집착)를 가집니다. 그러면, 그 대상은 닛짜(nicca) 본질이 있다고 하는 인식을 가질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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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실제는 그 대상이 가치를 잃거나 자신이 죽게 되어, 결국 인식된 가치가 제로(0)로 됩니다. 그 두 가지 결과(즉, 대상이 가치가 없게 되는 것과 자신이 죽은 것) 중 하나는 반드시 겪게 됩니다.
재탄생을 믿지 않고 아닛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1. 누군가가 재탄생 과정(윤회)을 믿지 않는다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혹이 높지 않다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감춰진 오염(아누사야, anusay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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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일생동안 어떤 것도 훔치지 않을 수 있지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는 것에 유혹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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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는, 마약 중독자는 육체가 죽은 후에 아무런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마약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마약을 섭취하며 즐기기만 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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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재탄생 과정(윤회)의 실제를 볼 수 있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사고방식이 극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과학이 말하는 것’만 믿고, 재탄생 과정(윤회)에 대한 계속 증가하는 증거를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재탄생(윤회)의 증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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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에 과학은 동의합니다. 모든 작용에는 그 반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깜마-(kammā)와 깜마- 위빠-까(kammā vipāka)는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입니다.
탐욕은 닛짜 본질이라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12. 로-바_lōbha(아빗자-_abhijjā)는 대상에 대해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마음에서 생성된 탐욕입니다. 이때, 사람은 소유물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기꺼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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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까-마 라-가(kāma rāga)를 가진 사람은 감각적 대상들을 즐기려 하지만, 그 대상들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혹이 높지 않다면 대부분의 ‘도덕적인 사람들’은 이 범주에 속합니다.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는 까-마 라-가를 가지지만 사악처에 떨어지는 행위를 하는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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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까다-가미(Sakadāgāmi, 사다함)는 그런 감각 대상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지만, 여전히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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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모든 욕망은 아나-가미(Anāgami, 아나함) 단계에서 없어집니다.
13. 달리 말하면, 유정체는 닙바-나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에 따라 마음을 즐겁게 하는 대상에 부여하는 가치를 잃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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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해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성자는 그런 욕망을 자동적으로 잃는다는 것입니다. 성자는 그런 욕망을 순전히 의지력으로 버릴 필요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3가지 특성(띠락카나, Tilakkhana)을 배우고 숙고함으로써 담마의 눈(법안) 또는 빤냐(지혜)를 개발함에 따라 그런 욕망의 위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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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적으로 그런 욕망을 억누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욕망은 단지 잠복 상태로 남아 있을 것(아누사야_anusaya로 남음)입니다. 그 아누사야(잠재성향)들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나중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아누사야(anusaya, 잠재성향)는 3가지 특성(띠락카나, Tilakkhana)를 이해함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아-사와, 아누사야, 및 가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에 대해서는, 또한 ‘주요 경 몇 개에 따라본 아닛짜와 둑카와 아낫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