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아닛짜 산냐를 계발하는 방법-2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How to Cultivate the Anicca Saññā – II’ 포스트
산냐-(saññā)는 보통 인식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아닛짜(anicca)를 배우는 것이 첫 단계이지만,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를 기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 2017년 11월 26일 개정; 2022년 6월 29일 개정
산냐- ㅡ 그것은 무엇인가?
1. 산냐-(saññā)는 보통 인식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으며, 이 포스트와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러한 더 깊은 측면들에 대해 언급할 것입니다. 이 포스트의 끝에 있는 링크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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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아닛짜)에 대해 읽을 때, 아닛짜(anicca)는 ‘어떤 것을 계속 만족스럽게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어지는 예들로부터, 이렇게 [위 문장으로] 기술된 것이 진실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단지 아닛짜(anicca)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입니다.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제 지혜로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닷사네나 빠하-땁바(dassanena pahātabba)’, 즉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보기 시작함’ 또는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ṇa)’를 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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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를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아닛짜(anicca)가 암시하는 것의 올바른 인식(지각)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통한 지식은 시작일 뿐이며, 마음으로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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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견해(딧티, diṭṭhi)와 왜곡된 산냐-(saññā)를 모두 제거하는 것이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필요합니다.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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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한 두 번째 포스트입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우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 우리 몸, 그리고 우리 마음을 우리가 계속 만족스럽도록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전 포스트인 ‘아닛짜 산냐를 계발하는 방법 - Ⅰ’를 참조하세요.
어떤 것에 대한 앎 ㅡ 다양한 레벨
2. 외부 대상을 숙고할 때, 많은 ‘산냐-(saññā) 레벨’이 있습니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 대상에 대해 ‘더 향상된 산냐-(saññā)’를 계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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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요한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과를 본 적이 없는 아마존 숲의 외딴 지역에서 온 사람이 사과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주어 쥐게 하고 ‘사과’라는 낱말을 가르친다면, 그는 이제 사과가 무엇인지 알지만, 단지 그가 사과를 다시 본다면 ‘그것은 사과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그 산냐(지각)에서만 사과를 압니다. 그는 여전히 사과의 맛이 어떤지는 모를 것입니다. 그 맛에 대한 심상을 얻기 위해서는 사과를 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더 맛있는 ‘익은 사과’를 감정할 수 있는 방법 등은 아직 모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익음’의 여러 단계와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사과까지 경험할 때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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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에 관한 그 모든 다른 측면들은 사과에 관한 산냐-(saññā)를 확실히 얻기 위해 경험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사과를 묘사할 수 있고, 그것을 쥘 때 무슨 느낌과 같은지, 어떤 맛인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사과’라는 말을 언급하면 그 모든 것이 즉각 그 사람의 마음에 떠올라 나타나게 됩니다.
3. 다른 예로서, 좀 떨어진 곳에서 정기적으로 일하고 있는 누군가를 본다면, 시장에서 그를 만났을 때 ‘사람 X’로 지각(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어울리게 되어 어떤 것을 함께 시작하게 되면, 곧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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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점에서는, 그를 힐끗 보더라도 그에 관한 모든 것이 마음에 떠올라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나 많은 자녀가 있는지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 등을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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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산냐-(saññā)는 [그 사람과 어울리기 전과는] 다른 수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과 더 많이 어울리거나 관계할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산냐-(saññā) 또는 그것에 대한 개념은 풍부하게 되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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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사람 X에 대한 산냐-(saññā)가 실제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경찰이 X가 아동 성추행범이라는 비디오 증거를 찾았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 X에 대한 산냐-(saññā)가 영구적으로 바뀝니다. 더 이상 X가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할 것입니다.
위빠-리따 산냐- ㅡ 이 세상에 대한 왜곡된 인식
4. 붓다께서는 ‘이 세상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하는 산냐-(saññā)는 ‘위빠리-타 산냐-(vipareetha saññā)’, 즉 왜곡되거나 잘못된 지각(인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영역에서 재탄생 과정(윤회)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잘못된 지각(인식)으로 인해 결국 가장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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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특성을 어느 정도 깨달을 때, 잘못된 지각(인식)이 바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대해 정말로 ‘삼마 딧티(Samma Ditthi, 올바른 견해)로 볼 때이며, 이때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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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가 ‘숨겨진 낚시바늘’를 보지 못하고 ‘맛있는 벌레’를 물게 되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처럼, 우리는 보통 ‘맛있는 물질적인 것들’에 숨겨진 고통을 보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결코 숨겨진 낚시바늘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며,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도 그것(숨겨진 고통)을 스스로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만이 알아낼 수 있으며, 붓다께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것(숨겨진 고통)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5. 그러므로, 아닛짜(anicca)가 ‘왜 그렇게 큰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의기소침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해는 반복적으로 노력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도달됩니다. [아닛짜를]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아닛짜(anicca)는 어떤 것도 장기적으로 만족스럽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좋은 출발점입니다. 그 다음, 실제 생활의 모든 기회에서 그 개념의 타당성을 점검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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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아닛짜(anicca)는 단순히 ‘어떤 것도 장기적으로 만족스럽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아닛짜(anicca) 특성에는 많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붓다께서 아닛짜를 기술한 또 다른 방법은 앗띠-야티(atteeyathi), 즉 ‘고기가 없는 뼈를 씹고 있는 개와 같다’라는 의미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는 뼈가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그 맛’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그 뼈에는 실제로 어떤 맛도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맛이지만, 때로는 잇몸이 출혈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피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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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anicca)의 다양한 측면은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아닛짜 - 진정한 의미(Anicca – True Meaning)’ 서브섹션에서 언급됩니다.
6. 개가 뼈를 매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씹는데 계속 많은 시간을 보내듯이, 사람들은 현상에서 한 순간에 불과한 감각적 즐거움에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의 실제 즐거움을 얻지만, 그 잠깐 동안의 감각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과 고통을 깨닫지 못합니다. 대부분 시간의 즐거움은 ‘기대하는 즐거움’입니다. 사람들은 ‘가질 수 있는 가능적 즐거움’을 보여주면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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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이것을 ‘막대기 앞에 달린 짚 더미의 먹이를 얻기 위해 열심히 무거운 수레를 끌고 있는 (옛날의) 황소에 비유했습니다. 눈 앞에 매달린 획득물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획득물만 생각)은 무거운 짐의 부담을 느끼지도 않게 하거나, 느낄지라도 단지 몇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된다고 하는 ‘보상’을 기대하면서 그 고통을 그냥 무시합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 가짐은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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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움의 대부분은 잠깐 동안만 지속되며, 단지 고난이나 비탄을 내려놓는 것에서 생깁니다. 물은 목마를 때 가장 맛이 납니다. 매우 목말랐을 때의 느낌을 생각해 보세요. 물 한 모금을 마셨을 때의 느낌은 천상에 있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물을 마시면서 목마름이 가시면서 ‘즐거움’도 사라졌습니다. 기껏 두 잔 후에는 ‘즐거운 느낌’은 불편함으로 변합니다.
감각적 즐거움의 보이지 않는 결점(문제점)
7. 이 같은 현상은 모든 감각적 즐거움에 적용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으로부터 ‘한 감각기관 또는 다른 감각기관에 있는 불편한 느낌을 경감(또는 제거)하라’는 압력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다른 포스트에서 언급한 ‘둑카 둑카(dukkha dukkha, 괴로운 느낌의 고통)’입니다. 얼마동안 무엇을 먹지 않았다면,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도록 재촉하는 충동이 생깁니다. 얼마동안 어떤 좋은 음악을 듣지 않았다면, 듣도록 재촉하는 충동이 시작됩니다. 그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생각하더라도 이것은 사실(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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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성관계의 즐거움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그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성적 즐거움의 대부분은 단지 그것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얻게 됩니다. 그것의 즐거움은 대부분 마음으로 만든 즐거움입니다. 이것을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성관계’에 비하여, 그것에 대해 ‘환상(생각)’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더 많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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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온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위가 가득 차면 맛이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음식을 먹은 것에 대해 여러 번 ‘굉장한 경험’을 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음식을 먹도록 재촉함에 의한 충동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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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불만족스러운 느낌’ 또는 ‘뭔가 빠져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앗띠야띠(aṭṭiyati)’입니다. 개는 뼈를 씹는 것에 지쳐서 잠시 그 뼈를 내버려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잠시 후 뼈를 씹도록 재촉하는 충동이 다시 나타나고 다시 뼈를 씹는 상태가 됩니다.
8. 충분히 만족하고 편안한 소파 위에 누워 있더라도, ‘채워지지 않은 느낌’, 즉 무언가 ‘빠졌음(실종)’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화를 보러 감’이나 ‘친구와 만나 채팅’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차를 타고 거기까지 운전해 가야 합니다. 영화를 보거나 친구와 만나 채팅하는 즐거움에 마음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옷을 차려 있고 운전하는 것과 관련된 부담(짐)은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거나 친구 만나는 시간이 끝난 후에, 차를 몰고 다시 와야 하고, 만족하지 못한 영화라면 좀 울적하거나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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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앗띠야띠(aṭṭiyati)’입니다. 끊임없이 마른 뼈를 씹어서 정신적 만족을 얻고 결국 싫증나고 피곤해지는 개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경우라면) 이렇게 우리가 살아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노년에 이르러 이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에 대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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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활동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집니다. 젊었을 때 인생을 즐겼지만 지금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 친구들, 친척들, 부모 또는 조부모가 있다면, 수년에 걸쳐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러한 모든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에너지가 없으며, 비록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감각기관은 많은 감각적 즐거움을 주지 않을 정도로 쇠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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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젊었을 때 가졌던 즐거움에 대해 돌이켜 생각(과거 회상)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거 회상의 생각은 ‘어떻게든 그러한 경험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하도록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게 될 때, 우울증이 시작됩니다.
야타-부-따 냐-나 ㅡ 위빠리-따 산냐-가 제거
9. 마음이 ‘끊임없는 고통’의 짐과, 그 모든 고통을 인내했지만 실제로 아무런 유익함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음에 따라, 마음은 기꺼이 그 짐을 포기하고 그런 갈망을 자동적으로 잃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쓸데없는 집착을 포기’하는 열쇠입니다. ‘아닛짜 - 끊임없는 압박(삘-라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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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된 포스트에서는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아닛짜(anicca)가 불가피하게 예기치 않은 ‘변화’를 초래할 때 어떻게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 검토됩니다. 이것은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상카-라(sankhāra)를 행함으로써 위빠리나-마 둑카(viparināma dukkha)로 인한 영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것은 상카-라 둑카(sankhāra dukkha)입니다. 그리고 ‘나쁜 유형의 상카-라(sankhāra), 즉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를 행하면, 직접적인 고통(dukkha dukkha, 괴로운 느낌의 고통)이 있는 견딜 수 없는 영역으로 재탄생되게 합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고통은 결국 아닛짜(anicca)로 인해 일어납니다.
10. 그것들은 묵상(숙고)되어야 할 핵심 개념입니다. 이것이 진짜 ‘위빠사나- 바-와나-(vipassanā bhāvanā,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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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적어도 전통적인 오계를 지키고, 가능하면 ‘2. 명상의 기본’ 포스트에서 언급한 ‘8가지 부도덕행’을 확실히 삼가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이러한 개념을 이해할 정도로는 충분히 침착하지 못합니다. ‘책을 통해 아는 것’과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ā)를 개발하는 것’의 차이는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서서히 분명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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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 때문에 ‘담마 개념’에 대해, 읽고 듣고 숙고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삽타 보짱가(Saptha Bojjanga, 칠각지) 중의 한 구성요소인 담마 위짜야(dhamma vicaya, 법의 조사)와, 사따라 이띠빠-다(Satara Iddhipāda, 4력) 중의 한 구성요소인 위-만사-(vīmaṁsā, 법의 이해_지혜)입니다. 개념이 명확해지면, 자동으로 아닛짜 산냐-(anicca sañña)가 계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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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몸에서 그것들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11. 삿따 봇장가의 육성을 통한 막가 팔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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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아라한과(Arahanthood)로 가는 과정입니다. 아라한뜨(Arahant) 단계에서만 아닛짜(anicca)를 참으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최소한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단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수다원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위에서 링크한 포스트에서 필자의 경험을 언급한 것과 같이 바로 이 생에서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무상이 아니다 ㅡ 아닛짜는 훨씬 더 깊다
11.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무상(impermanence)’에 대해 명상하며 오랜 시간(또는 수 년) 동안을 보냈지만 결과가 없다면, 아닛짜(anicca) 특성에 대해 명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치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명상하기만 하면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필자는 경험을 통해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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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잘못된 아닛짜/둑카/아낫따, 그리고 잘못된 아-나-빠-나사띠 바-와나-(ānāpānasati bhāvanā) 같은 몇 가지 다른 것들을 숙고하면서 진척없이 4-5년을 보냈습니다. 필자는 정말로 아닛짜/둑카/아낫따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접하게 된 바로 그 첫 법문(와하라까 테로의 법문)이 진척을 순간적으로 바꿨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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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적으로 문제는 단지 ‘좋은 느낌’이나 ‘자나-(jhānā, 선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야(apāya, 악처)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가띠(gati, 성향)를 제거했는가’이며, 이것을 깨닫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탐함, 성냄, 미혹함을 제거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리빙 담마’ 섹션의 ‘성스런 팔정도로 이행(변천)(Transition to Noble Eightfold Path)’ 서브섹션에 있는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