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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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닷사나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원문: Living Dhamma 섹션의 ‘Anidassana Viññāṇa – What It Really Means’ 포스트

2018년 1월 6일; 2019년 10월 10일 개정; 2021년 4월 12일 개정; 2022년 1월 12일 개정

 

소개

 

1. 필자는 여러 토론 포럼에서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viññāṇā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 pabhaṁ..)”이라는 구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수수께끼같은 구절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논란(풀리지 않은 문제)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Viññāṇa anidassana: the state of boundless consciousnes.’를 보세요.

 

  • * 대부분의 일반적인 번역은 '나타나지 않고(때로는 표면화되지 않고), 무한하고, 사방에 두루 빛나는 의식’과 같은 어떤 것을 말합니다.

  • * 그런 잘못된 번역은 ‘아니닷사나 윈냐-나(anidassana viññāna)’가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와 동일하고 심지어 ‘바왕가(bhavanga)’와 동일하다고 말함으로써 또 다른 극단적 오류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놀랄만한 잘못입니다!

 

윈냐-나는 무엇인가?

 

2. 윈냐-나(viññāṇa)는 이해해야 할 중심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필자는 ‘리빙 담마’의 2차서브 섹션인 ‘윈냐-나 무더기(Viññāna Aggregate)’ 에서 윈냐-나(viññāṇa)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 * 이 포스트에서는, 띠삐따까(Tipitaka, 삼장)에 있는 모든 [관련된] 숫따(sutta)와 일치하는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viññāṇā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 pabhaṁ..)”이라는 구절에 대한 의미심장한 번역을 서술합니다. 필자는 그와 반대되는 어떤 증거라도 환영할 것입니다.

  • * 이제 심오한 개념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다른 관련 포스트들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각자의 배경 [지식]에 따라 이러한 개념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 * ‘윈냐-나 무더기(Viññāna Aggregate)’ 2차서브 섹션이 포함된 ‘나-마 & 루-빠에서 '나-마루-빠'로(Nāma & Rūpa to Nāmarūpa)’ 서브 섹션의 포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리빙 담마’ 섹션의 앞부분에 있는 서브 섹션으로 돌아가서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리빙 담마’ 섹션은 단순한 내용에서 심오한 내용으로 나아가도록 배열되어 있습니다.

 

아니닷사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 먼저, 띠삐따까(Tipitaka, 삼장)에서 ‘아니닷사나(anidassana)’의 의미를 찾아 보겠습니다. 니닷사나(nidassana)라는 낱말의 의미는 ‘보이는 일러스트'를 의미합니다. 아니닷사나(anidassana)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 * 예를 들어, 담마-(dhammā)가 마나 인드리야(mana indriya)에 부딪쳐 마노 윈냐-나(mano viññāna)가 일어납니다. 이는 ‘담만짜 빠띳짜 담마- 짜 웁빳자띠 마노-윈냐-낭(manañca paṭicca dhammē ca uppajjati manōviññāṇaṃ)’ 과정을 통한 것입니다. 그 담마-(dhammā) 또한 볼 수 없습니다. 담마-(dhammā)는 숫닷-타까(suddhāṭṭhaka) 단계 아래에 있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 * 이 담마-(dhammā)는 “아니닷사난 압빠띠간 담마-야따나 빠리야-빤나 루-빤(anidassanan appatighan dhammāyatana pariyāpanna rūpan)”이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담마-야따나(dhammāyatana)에 속합니다. ‘루-빠란 무엇인가 – 담마도 루-빠다’ 포스트를 보세요.

 

4. 까까쭈-빠마 숫따( Kakacūpama Sutta, MN 21 )에서는,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āgaccheyya lākhaṃ vā haliddiṃ vā nīlaṃ vā mañjiṭṭhaṃ vā ādāya. So evaṃ vadeyya: ‘ahaṃ imasmiṃ ākāse rūpaṃ likhissāmi, rūpapātubhāvaṃ karissāmī’ti.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imasmiṃ ākāse rūpaṃ likheyya, rūpapātubhāvaṃ kareyyā”ti? “No hetaṃ, Bhante”. “Taṃ kissa hetu”? “Ayañhi, Bhante, ākāso arūpī anidassano. .”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번역: “..비쿠들이여, 어떤 사람이 흰색이나  노란색이나 짙은 녹색이나 진홍색 물감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형상 그림을 그리겠다. 물체 형상이 나타나게 하겠다’고 말한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이 물감으로 하늘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스승님. 빈 하늘에 형체로 나타낼 수 있는 보이는 형상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 ‘Nibbāna-The Mind Stilled’ 시리즈에서, 빅쿠 까뚜꾸룬데 냐-나난다(Katukurunde Ñāṇananda)는 ‘아니닷사나(anidassana)’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 또는  ‘나타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증거를 더 주셨습니다. ‘Katukurunde Nyanananda Thera’의 출판물(Published work) 섹션에서 볼 수 있는 [‘Nibbāna-The Mind Stilled’ 시리즈의] Volume II의  법문 7 및 8을 참조하세요. 

 

 

윈냐-나는 의식보다 더한 것이다

 

6. 테라와다(Theravada) 교재에서도 윈냐-나(viññāna)는 ‘의식(consciousness)’ 또는 ‘인식(awareness)’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의미가] 훨씬 더 많습니다. 윈냐-나(viññāna)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희망과 욕망’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물질(루-빠) 사이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 *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이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성취하기(얻기) 위해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와 까-야 상카-라(kāya sankhāra)를 행합니다. 그 다음,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nkhāra paccayā viññāna)’ 단계가 ‘상응하는 윈냐-나’를 기르는 것으로 이끕니다.

  • * 윈냐-나(viññāna)는 냐-나(ñāna)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스런 길(팔정도)을 따라갈 때, 자연의 세 가지 특성,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잘못된 희망을 가지는 것의 헛됨을 깨닫게 됩니다. 즉, 빤냐-(paññā)를 개발하게 됩니다.

 

7. 그것(윈냐-나를 기르는 것)은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 Samuppāda, 연기)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즉, “avijjā paccayā saṅkhāra; 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 viññāṇa paccayā nāmarūpa, nāmarūpa paccayā salāyatana, salāyatana paccayā phassō, phassa paccayā vēdanā, vēdanā paccayā taṇhā, taṇhā paccayā upādāna, upādāna paccayā bhavō, bhava paccayā jāti, jāti paccayā jarā, marana, sō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 * 모든 미래 고통은 즐거운 세상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아윗자-(avijjā)로 행하고(즉, 아비상카-라를 생성하고), 그래서 윈냐-나(viññāna)를 생성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두 가지 유형의 윈냐-나

 

8. 인간의 각 찟따(citta)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는데, [그 동안에] 9단계를 거쳐 오염됩니다. 그 다음 [마지막에] 윈냐-낙칸다(viññānakkhandha)에 추가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빠밧사라 찟따, 빛나는 마음, 및 바왕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오염된 찟따(citta)’입니다. 그것들은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 단계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는 단지 의식(consciousness) 또는 인식(awareness)입니다.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를 참조하세요. 

  • * 찟따(citta)의 오염은 산냐-(saññā)와 웨-다나-(vēdanā)에서 나타납니다.

  • *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빙 담마’ 섹션의 ‘나-마 & 루-빠에서 나-마루-빠로(Nāma & Rūpa to Nāmarūpa)’ 서브섹션의 포스트들을 보세요.

 

9. 상기-띠 숫따( Saṅgīti Sutta, Digha Nikaya 33 )에는 “Tividhena rūpasaṅgaho—s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m, 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anidassanaappaṭighaṃ rūpaṃ”로 설해져 있습니다.

 

번역: “3가지 유형의 루-빠(물질)이 있다.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루-빠’, ‘볼 수 없고 잡을 수 있는 루-빠’,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루-빠’가 그것이다.”

 

  • * 3가지 유형의 루-빠는 6가지 감각 기능, 즉 ‘5가지 육체적 감각 기능’과 ‘마나 인드리야(mana indriya)’로 감각됩니다. 

  • * 마나 인드리야(mana indriya)로 탐지되는 루-빠는 담마-(dhammā)입니다. 이는 ‘만난짜 빠띳짜 담메- 짜 웁빳자띠 마노-윈냐-낭(manañca paṭicca dhammē ca uppajjati manōviññāṇaṃ)’ 과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루-빠란 무엇인가 – 담마도 루-빠다’ 포스트를 보세요.

  • * 이것은 세 번째 유형의 루-빠, 즉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루-빠(anidassan aappaṭighaṃ rūpa)’ 입니다. 즉, “아니닷사낭 압빠디강 담마-야따나 빠리야-빤나 루-빵(anidassanaṃ appaṭighaṃ dhammāyatana pariyāpanna rūpaṃ)”입니다. ‘루-빠란 무엇인가 – 담마도 루-빠다’ 포스트를 보세요.

  • * 세 번째 유형의 그 루-빠(rupā)는 윈냐-나(viññāna)로 인해 일어나는 나-마루-빠(nāmarūpa)와 동일합니다. ‘깜마 윈냐-나와 나-마-루빠 빠리쩨따 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것은 ‘리빙 담마’ 섹션의 ‘나-마 & 루-빠에서 나-마루-빠로(Nāma & Rūpa to Nāmarūpa)’ 서브섹션에서 체계적으로 설명됩니다.

 

윈냐-나는 마음과 물질의 연결 고리다

 

10. 윈냐-나(viññāna)는 대부분의 경우 ‘나-마(nāma, 마음)’ 범주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물질 사이의 연결고리이기도 합니다.

 

  • * 빠띳짜사뭅빠-다 위방가( Paṭiccasamuppāda Vibhaṅga )에서,  나-마(nāma)는 처음 3가지 칸다(khandha, 무더기)로만 정의됩니다. 즉, “땃타 까따망 나-망? 웨다나-악칸도, 산냐-악칸도, 상카-락칸도 - 이당 윳짜띠 나-망(Tattha katamaṃ nāmaṃ? Vedanākkhandho, saññākkhandho, saṅkhārakkhandho—idaṃ vuccati nāmaṃ)”로 정의됩니다. 이것은 윈냐-나 칸다(viññāna khandha)가 실제로는 나-마(nāma, 마음)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 * 위빠까 윈냐-나(vipaka viññāna)가 비록 결정적으로 나-마(nāma) 범주에 속한다 하더라도,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깜마]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루-빠(rupā) 범주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때로 윈냐-나(viññāna)가 나-마(nāma)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 * 이것은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을 먼저 읽어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그에 뿌리박힌 [깜마] 에너지를 지닌다는 점에서 위빠까 윈냐-나(vipaka viññāna)와는 다릅니다.

  • * 이것은 맛제 숫따( Majje Sutta, AN 6.61 )에서 확고하게 확인되는데, 이 숫따에서 붓다께서는, 나마(nama)는 한쪽 끝에 있고, 루-빠(rūpa)는 반대쪽 끝에 있으며, 윈냐-나(viññāna)가 중간에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빠알리 원문은] “나-망 코, 아-우소, 에꼬 안또, 루-빵 두띠요 안또, 윈냐-낭 맛제(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입니다.

 

윈냐-나는 재탄생과 괴로움의 원인이다

 

11. 고통(괴로움)의 원인으로서 윈냐-나(viññāna)의 참된 본성은 ‘드와야따-누빳사나-숫따( Dvayatānupassanāsutta (Sutta Nipata 3.12) )’에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해져 있습니다.

 

“양 낀찌 둑캉 삼보띠(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삽방 윈냐-나빳짜야-(sabbaṃ viññāṇapaccayā);

위냐-낫사 니로데나(viññāṇassa nirodhena),

낫티 둑캇사 삼바오(natthi dukkhassa sambhavo).

 

번역: “어떤 고통(괴로움)이 일어나든 간에, 모든 고통(괴로움)은 윈냐-나로 인해 일어난다; 윈냐-나의 일어남이 그치면, 새로운 존재로 인한 고통(괴로움)은 일어날 수 없다.” 여기서 윈냐-나는 구체적으로 위 #8에서 논의한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를 나타낸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 * [위 숫따의 구절] 그것으로, ‘윈냐-나(viññāṇa)가 닙바-나(Nibbāna),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  또는 바왕가(bhavanga)와 동일하다’는 어떤 논쟁도  멈춰야 합니다.

  • * 필자가 말하려 했던 결정적인 점은, 어딘가에서 그러한 극심한 모순을 볼 때 그 출처의 신뢰성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담마공부 및 수행에서]  진전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브라흐마니만따니까 숫따(MN 49)

 

12.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viññāṇā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 pabhaṁ..)”라는 구절은 브라흐마니만따니까 숫따( Brahmanimantanika Sutta, Majjhima Nikaya 49 )에 나옵니다. 먼저 이 구절의 의미와 관련된 숫따(sutta)의 본질적인 부분을 제공하겠습니다.

 

다음은 평이한 영어로 된  숫따의 에센스(정수)입니다.

 

한 때 붓다께서 마하 브라흐마 영역( ‘31 존재 영역’ 참조)의 우두머리인 바까 브라흐마-(Baka Brahmā)의 마음에 “내 존재는 영구적이고 안정적이고 영원하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잘못된 견해가 일어난 것을 보셨습니다.

 

바까 브라흐마-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붓다께서는 욱깟타-의 수바가 숲에 있는 큰 ‘사-알 나무(sāl-tree)’ 근처에서 사라져서 브라흐마 세계에 나타나셨습니다.

 

바까 브라흐마-(Baka Brahmā)는 붓다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환영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다니, 마-리사, 닛짱, 이당 두왕, 이당 삿사땅, 이당 께왈랑, 이당 아짜와나담망, 이다니 나 자-야띠 나 지-야띠 나 미-야띠 나 짜와띠 나 우빠빳자띠. 이또 짜 빠난낭 웃따리 닛사라낭 낫티-’띠(Idañhi, mārisa, niccaṃ, idaṃ dhuvaṃ, idaṃ sassataṃ, idaṃ kevalaṃ, idaṃ acavanadhammaṃ, idañhi na jāyati na jīyati na mīyati na cavati na upapajjati. Ito ca panaññaṃ uttari nissaraṇaṃ natthī’ti).”

 

번역: “선한 분이여, 이 존재는 저가 좋아하는 대로 유지할 수 있고, 안정적이며 영원합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없어지지 않고, 태어나지 않으며, 노화되거나 죽거나 사라지거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존재에서 더 이상의 해방(자유로움)은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대는 모릅니다. 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있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가 [영구적이라고] 말한 대로 영구적이지 않습니다…”(yatra hi nāma aniccaṃyeva samānaṃ niccanti vakkhati, addhuvaṃyeva samānaṃ dhuvanti vakkhati).

 

  • * 그런데, 여기서 ‘영구적’의 빠알리어는 ‘닛짜(nicca)’가 아니라 ‘드후와(dhuva)’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붓다께서는 추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더 이상의 해방(자유로움)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정말로 영구적인 해방이 있습니다.”(santañca panaññaṃ uttari nissaraṇaṃ “natthaññaṃ uttari nissaraṇan” ti vakkhatī’ti).

 

  • * 그 다음, 브라흐마의 특별한 모임에 들어간 데와(deva)인 마라(Māra)가 브라흐마를 옹호하기 위해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그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러자, 바까 브라흐마-(Baka Brahmā)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한 분이여, 저는 좋아하는 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닛짜(nicca)라고 말합니다. 저는 안정적이기 때문에 안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더 이상 고통(괴로움)이 없습니다……빠따위(patavi), 아-뽀(āpo), 떼조(tejo), 와요(vāyo) 다뚜(dhatu)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바까 브라흐마-는 ‘4가지 마하- 다뚜’로부터 이루어지는 까-마 로-까(kāma lōka)에서 즐길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땅하-’를 극복했다는 의미임).

 

붓다께서는 ‘바까 브라흐마-’에게 실제로 ‘바까 브라흐마-’가 ‘까-마 로-까(욕계)’를 초월했다는 것을 정말로 알고 있고 그의 힘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는 바까 브라흐마-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1) 더 높은 브라흐마 영역이 있고, (2) 바까 브라흐마- 자신은 아밧사라 브라흐마(Abhassara Brahma) 영역에 있었고, 그곳에서 죽어 이 낮은 브라흐마 영역에 다시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바까 브라흐마-에게, “그대는 그 더 높은 영역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나는 그(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바까 브라흐마-(Baka Brahmā)에게 말씀하시는 숫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빠따윙 코 아항, 브라흐메, 빠따위또 아빈냐-야 야-와따- 빠따위야- 빠따왓떼나 아나누부-땅 따다빈냐-야 빠따윙 나-빠호싱, 빠타위야- 나-빠호싱, 빠타위또 나-빠호싱, 빠따윙 메띠 나-빠호싱, 빠따윙 나-비와딩…(pathaviṃ kho ahaṃ, brahme, pathavito abhiññāya yāvatā pathaviyā pathavattena ananubhūtaṃ tadabhiññāya pathaviṃ nāpahosiṃ, pathaviyā nāpahosiṃ, pathavito nāpahosiṃ, pathaviṃ meti nāpahosiṃ, pathaviṃ nābhivadiṃ…)”

 

번역: “브라흐마여, 빠따위(patavi)를 단지 생명이 없는 빠따위(patavi)로 알고, 빠따위(patavi)의 진정한 본질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빠따위(patavi)를 ‘나’로 여기지 않습니다. (4가지 ‘마하- 부-따_mahā bhūta’로 만들어진 ‘까-마 로-까_kāma lōka’에 있는 것들에 들러붙지 않음)”.

 

  • * 그 다음, 붓다께서는 나머지  3가지 마하- 부-따(mahā bhūta)에 대해서 동일한 구절을 반복하셨습니다. 나머지 3가지 마하- 부-따(mahā bhūta)는 까-마 로-까(kāma lōka)에서 유정체의 몸을 이루는 아-뽀(āpo), 떼조(tejo), 와요(vāyo)입니다.

 

마지막으로, 붓다께서는 다음 구절로 모두 요약하셨습니다. ‘빠밧사라 찟따, 빛나는 마음, 및 바왕가’ 포스트에서 논의한 다음 구절입니다.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 땅 빠타위야- 빠타왓떼나 아나누부-땅, 아-빳사 아-빳떼나 아나누부-땅, 떼잣사 떼잣떼나 아나누부-땅, 와-얏사와-얏떼나 아나누부-땅, 부-따-낭 부-땃떼나 아나누부-땅, 데와-낭 데왓떼나 아나누부-땅, 빠자-빠띳사 빠자-빠띳떼나 아나누부-땅, 브라흐마-낭 브라흐맛떼나 아나누부-땅, 아-밧사라-낭 아-밧사랏떼나 아나누부-땅, 수바낀하-낭 수바낀핫떼나 아나누부-땅, 웨합팔라-낭 웨합팔랏떼나 아나누부-땅, 아비붓사 아비붓떼나 아나누부-땅, 삽밧사 삽밧떼나 아나누부-땅.(Viññāṇaṃ anidassanaṃ anantaṃ sabbato pabhaṃ, taṃ pathaviyā pathavattena ananubhūtaṃ, āpassa āpattena ananubhūtaṃ, tejassa tejattena ananubhūtaṃ, vāyassavāyattena ananubhūtaṃ, bhūtānaṃ bhūtattena ananubhūtaṃ, devānaṃ devattena ananubhūtaṃ, pajāpatissa pajāpatittena ananubhūtaṃ, brahmānaṃ brahmattena ananubhūtaṃ, ābhassarānaṃ ābhassarattena ananubhūtaṃ, subhakiṇhānaṃ subhakiṇhattena ananubhūtaṃ, vehapphalānaṃ vehapphalattena ananubhūtaṃ, abhibhussa abhibhuttena ananubhūtaṃ, sabbassa sabbattena ananubhūtaṃ.)”

 

번역: “윈냐-나는 보이지 않고, 무한하며[무한하게 계속되며], 모두에게 재탄생 과정(윤회)으로 이끕니다. 윈냐-나(오염된 의식)로는  빠따위(patavi), 아-뽀(āpo), 떼조(tejo), 와요(vāyo),  부-따(bhūta), 데와(deva), 빠자-빠띠 브라흐마(pajāpati brahma), 아-밧사라 브라흐마(ābhassara brahma), 수바낀하 브라흐마(subhakiṇha brahma), 웨합팔라 브라흐마(vehapphala brahma) 등, 이 세상 모든 것(삽바, sabba)의 실제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붓다께서는 이렇게 끝맺으셨습니다.

“그래서 브라흐마여, 나는 단지 ‘초월적 지식(신통력)’과 관련해서만 그대보다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실로 그대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브라흐마는 붓다께 도전하여, 자신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면서 붓다께서 더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브라흐마는 붓다로부터 사라져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붓다께서 “브라흐마며, 이제 내가 그대로부터 사라지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찾아 보십시오.”라고 하시며 사라지셨습니다. 물론, 브라흐마는 사라지신 붓다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긴 숫따(sutta)의 본질(에센스)이며, 이 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31 영역의 어떤 곳에도 피난처가 없다

 

13. 우리는 정말로 ‘마하 브라흐마(Maha Brahma)’가 우리 우주 나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매우 긴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수십억 년).

 

  • * 또한, 브라흐마는 우리와 같은 고형의 몸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질병이나 신체적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바와(bhava)가 끝날 때까지 평화로운 삶을 누립니다. 바까 브라흐마(Baka Brahma)가 인간과 같은 고형의 신체를 없애서 모든 고통(괴로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영역의 유정체의 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1존재계의 몸 유형 - 마노마야 까야의 중요성’ 포스트를 보세요.

  • * 물론, 브라흐마는 여전히 미래에 아빠-야(apāya)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최소한 닙바-나의 소-따빤냐(수다원)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억압했을 뿐이며, 10가지 상요자나(족쇄) 중의 그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 * 그것은 단지 약 100년 동안만 지속되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신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신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이 고약한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삭까야 딧티(sakkaya ditthi)를 제거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 * 문제는 ‘자아(self)’가 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자아(self)’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아(self)’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어떤 것을 하는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개로 태어나면 그것은 동일한 자아일까요? 그러나 (이를테면, 공공장소에서 배변하고, 아이들과 성관계를 하는 등) 개가 하는 저열한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은 개로 태어날 것입니다.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부도덕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고 미래 생에서 고통 (괴로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14. 이 포스트가 이 서브섹션의 다른 포스트와 함께 윈냐-나(viññāṇa)가 무엇인지, 그리고 유명한 구절인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viññāṇā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 pabha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 모든 사람이 토론의 혜택(이득)을 받을 수 있도록, 토론 포럼에서 의견/제안/비평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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