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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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낫따와 둑카 – 진정한 의미


원문 : Key Dhamma Concepts 카테고리의 ‘Anatta and Dukkha – True Meanings’ 포스트


결국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입니다. 자아(self)의 개념이 아주 분명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무아(no-self)를 해석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낫따(anatta)가 무아(no-self)를 의미한다면, 사람 A와 사람 B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A가 B의 소유인 어떤 물건을 취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저도 없고, 당신도 없습니다. 당신 물건을 사용하는 저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B가 무아(no-self)를 믿으면 A에게 자신의 물건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 마찬가지로, 다른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무아라면, (ⅰ) 누가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합니까? (ⅱ) 누가 도덕적 행위 또는 비도덕적 행위를 합니까? 등이 있습니다.

* 대신에 ‘각자는 이 재탄생 과정(윤회)에서 정말로 무력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의 일을 제어(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아낫따(anatta)의 개념입니다.


1. 붓다께서 언급하신 두 용어, 아-트마(äthma)와 아나-트마(anäthma)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라마자라 숫따(Brahmajala sutta)에서 붓다께서는 그 양쪽 모두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필자가 믿건대, 현재로 그 두 용어에 대한 최선의 번역은 ‘영혼(soul)’과 ‘무혼(no-soul, 영혼없음)’이라고 봅니다.


* 변하지 않는 실체라는 의미에서 ‘영혼’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믿는 것을 예로 들면, 사람의 영혼은 지옥이나 천국으로 간 다음 그 영혼이 영원히 그 상태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 유물론자에 의해 해석되는 의미에서 ‘무혼(영혼없음)’은, ‘사람’은 단지 물질적인 뇌에서 생기는 생각(마음)을 가진 육체일 뿐이고, 그 사람이 죽으면 이야기의 끝이며, 육체적 죽음에서 살아남는 것은 없습니다.

* 이들은 아- 트마(athma, 영혼)와 아나-트마(anathma, 무혼_영혼없음)로, 붓다께서 [옳지 않다고] 거부하신 두 극단이었습니다.


2. 빠알리 용어인 아낫따(anatta)가 산스크리트어로 아나트마(anathma)로 번역되었을 때, 정말로 심각한 혼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산스크리트어인 아나트마(anathma)는 영어로 노-셀프(no-self, 무아)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아트마(athma)가 영혼(soul)으로 번역된 것과 함께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3. 진짜 문제는 어떤 사람이 ‘무아(no-self)가 있다, 또는 무아 특성이 있다(there is ‘no-self’)’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때, 그 사람은 ‘영혼(soul), 즉 아트마(athma)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어떤 사람이 죽으면 이야기의 끝, 즉 재탄생 과정이 없다는 것을 ‘무아(no-self, 자아없음)’로 의미한다면, 이것은 ‘무혼(no-soul, 영혼없음)’과 동일합니다.

* 혹은,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죽음에서 살아남는 것이 없다’는 위의 유물론적 견해와는 다르게 ‘[개성이] 변하는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견해, 즉 ‘인간이 동물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무아(no-self, 자아없음)’, 또는 필자가 ‘끊임없이 [개성이] 변하는 존재’로 부르는 올바른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에 대해 숙고하고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명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4. 그러나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무아(no-self, 자아없음)라는 말을 정말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붓다께서는 '자아(나)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나’가 없기 때문에 담마 공부를 해 나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말합니다.

* 다른 사람들은 ‘설령 내가 죽고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무아(no-self)이므로 그 동물은 내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 그들이 ‘무혼(no-soul, 영혼없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필자가 그들에게 묻는 말은, ‘만약에 ‘나’가 없다면, 누군가가 막대기나 흉기로 당신을 세게 치더라도 괜찮은가?’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확실히 ‘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담마를 배우거나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입니다.


5. 우리는 간단한 비유를 통해 ‘영혼’과 ‘무혼(영혼없음)’의 이 두 극단 개념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 분수(분출)로 만든 여러 가지 모양과 색상을 보아 왔습니다. 여기에 그러한 모양의 몇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 얼마 길이로 잘라낸 비디오가 있습니다.


<The Most Beautiful Fountains, 15 Spectacular Fountains in The World (Part 2)>

https://youtu.be/qbNYLG_GL3w


* 우리는 물로 만들어진 그러한 구조물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같은 방식으로,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입니다. 따라서, ‘자아(self)'와 '무아(no-self, 자아없음)’는 모두 잘못된 인식입니다.

* 우리가 그 물 분수(분출)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다른 모양과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재탄생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를 거칩니다.

* 그러나 고통(괴로움) 또는 간헐적인 행복은 실제로 있습니다.


6. 이것은 심오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아라한이 아닌 한, ‘나’라는 내적 지각(sanna, 산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재탄생 과정을 겪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지각(sanna, 산냐)은 마음이 ‘나’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함으로써 제거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세상의 진정한 속성을 배우기 시작할 때, 마음은 점차 실제 ‘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 흐름(lifestream)’만이 있음을 점차 깨닫습니다.


* 따라서, 천년 동안, 아나-트마(anäthma), 무아(no-self), 혹은 ‘내가 없다’는 의미의 어떤 말을 중얼거리면서 명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깊은 내부에서는 진정으로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 단계에 가까운 어떤 경지나, ‘니라미사 수카(niramisa sukha, 탐진치의 포기에 의한 행복)’에조차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대신에,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가질만한 실속이 없다’ 또는 ‘이 재탄생 과정에서 각자는 정말로 무력하다[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낫따(anatta)의 개념입니다.

* 아낫따(anatta)에 대한 또 다른 용어는 아나-타(anätha)입니다. 이것은 싱할라어의 용어로서, ‘완전히 무력한[원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재탄생 과정의 위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반대는 나-타(nätha)로서, 이는 빠알리어에서 붓다를 지칭할 때 실제로 사용됩니다. 즉, ‘유정체가 붓다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나-타(nätha)가 된다’와 같이 사용됩니다.


7. 즉,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한, '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부정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갈망합니다.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은, 장기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실속이 없고 결실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 할지라도, 사람은 정말로 무력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낫따(anatta)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 그러나, 그것(아낫따_anatta의 진정한 의미)은 그것에 대해 [책 또는 경전을] 읽는 것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삶에서 실례로서 숙고(명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갈망이 점차적으로 약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둑카(Dukkha)는 단순히 고통(괴로움)만이 아닐까?>


1. 대부분 사람은 두카(dukha)둑카(dukkha)란 말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붓다께서 고통(괴로움)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고통(괴로움)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두카(dukha)입니다. 둑카(dukkha, dhkha+khya)는 ‘숨겨진 고통(괴로움)이 있고 고통(괴로움)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야(khya)는 제거를 뜻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삼사-라)의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그리고, 둑카 삿짜(dukkha sacca, 첫 번째 성스런 진리)는 우리가 감각적 즐거움으로 소중히 여기는 그것들이 사실은 이 ‘숨겨진 고통(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보는 앎입니다.


2. 두카(dukha)는 웨다나(vedana, 느낌)입니다. 누구나, 동물이라도 두카(dukha)를 느낍니다. ‘이 세상에 두카(dukha)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누구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없이 명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두카(dukha)를 깨달음으로써 누군가가 닙바나(Nibbana)를 얻을 수 있다면, 동물들이 닙바나(Nibbana)를 먼저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이 두카(dukha, 고통)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둑카(dukkha) 또는 둑카 삿짜(dukkha sacca)는 첫 번째 성스런 진리입니다. 이는 이 모든 겉으로 보이는 행복 뒤에는 ‘숨겨진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열심히 일함으로써 미래에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 둑카 삿짜(dukkha Sacca)는 고통(괴로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괴로움)의 원인,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경향이 있는 부도덕한 것들에 대해 숙고함에 따라, 이해되는 것입니다.

* 둑카(dukkha)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대한 붓다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닙바나(Nibbana)의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이르지 않는 한, 대부분의 고통(괴로움)이 미래의 재탄생에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 그래서, 지혜(panna, 빤냐)를 얻고 정말로 길(팔정도)에 들어가 시작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고통(괴로움)이 가득한 4악처를 포함하여 우리의 감각이 다른 영역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축생계는 제외), 붓다 메시지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믿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3. [둑카(dukkha)에 대한] 이 잘못된 파악은 또한 ‘호흡관(잘못된 아나빠나사띠)’을 고통(괴로움) 제거의 수행 방법으로 널리 퍼지게 하여 대중화시키는 것으로 이끌었습니다.


* 호흡관을 통해, 일시적으로 고통(괴로움)을 제거하고 선정(자나)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호흡관(잘못된 아나빠나사띠)’은] 붓다께서 강조하신 ‘장기적 윤회 고통(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 진정한 ‘아나빠나사띠’를 개발할 때, 일시적으로 고통을 제거하고 닙바나의 영원한 행복을 향해 [그 ‘아나빠나사띠’가] 작용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What is Anapana?’ 포스트를 참고하세요.


4. 대부분 사람들은 붓다 담마는 고통을 강조하기 때문에 비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 붓다께서는 단지 나쁜 소식의 진실을 전하신 메신저였습니다. 붓다께서는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여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31영역 내의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날지라도 [영원한] 행복을 찾지 못할 것이고, 결국 고통(괴로움)이 우세하게 된다는 나쁜 소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The Four Stages in Attaining Nibban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끊임없는 변화,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끊임없는 무질서에 기초한 (무상한) 세상은 본질적으로 안정성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닛짜(anicca)는 무상 자체가 아니라, 무상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is Part of Anicc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세상에서] 그 체계(시스템)를 이기고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니짜(nicca)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둑카(dukkha)를 깨달은 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닛짜(anicca)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기적으로 볼 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5. 붓다께서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안정되고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그래서 불만족스러운 존재의 속성을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셨습니다. 이 길이 성스런(고귀한) 팔정도입니다.


6. 그래서, 둑카(dukkha)는 누군가가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낙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참으로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깨달을 때,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헛되이 고군 분투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발적 포기는 소따빠나(Sotapanna, 수다원) 단계 전의 행복한 마음 상태까지 이르게 합니다.

* 이 특별한 행복인 니라미사 수카(niramisa sukha)는 감각적 즐거움과는 다르며, 사람이 [팔정도의] 길을 따라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고, 아라한 단계의 조건지어지지 않은 행복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Three Kinds of Happiness – What is Niramisa Sukh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 삶 동안에 닙바나(Nibbana)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내내 이 니라미사 수카(niramisa sukha)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7. 깨달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단 두가지 방식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 한 가지 방식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있다가 이 생에서조차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젊을 때 즐겼던 것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즐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리의 즐거움, 시각, 청각, 성감 등 모든 감각 능력이 저하됩니다. 큰 병이 있다면, 그 능력은 더 저하될 것입니다. 참으로 더 나쁜 것은 그때에는 [운명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늙게 되면 정신력조차도 저하되고(실제로는 뇌가 쇠약해짐) 어떤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다른 한 가지 방식은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지금 통찰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31영역으로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셨습니다. 최소한 붓다께서 제시하신 ‘큰 그림’을 검토하여 그 그림이 합리적인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 사람들은 자살을 하여 고통(괴로움)을 끝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재탄생을 그치는 것입니다. 고통(괴로움)을 끝낼 것이 31영역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습니다. 더 높은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긴 기간 동안의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윤회의 시간 척도에서는 그 기간도 단지 순간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Sansaric Time Scale, Buddhist Cosmology, and the Big Bang Theory’ 포스트와 ‘Infinity – How Big Is It?’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그리고 붓다께서 말씀하신 길(팔정도)을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다. 탐함, 미워함 및 미혹함을 제거하여 니라미사 수카(niramisa sukha)를 경험할 때 닙바나(Nibbana)의 초기 단계인 쿨링 다운(cooling down, 불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How to Taste Nibban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것은 담마를 좋아함(찬다, chanda)을 강하게 하고, 결심(찟따, citta)과 노력(위리야, viriya)을 증장하여, 통찰(위망사, vimansa)를 구하게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Four Bases of Mental Power (Satara Iddhipad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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